아더 핑크(1886-1952)
아더 핑크는 20세기 초에 활동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개혁주의 성경 교사이며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1886년에 영국 노팅햄의 침례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음악 공부를 조금 하였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청소년 사업가'가 되어서 나름대로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친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으면서도 회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한때는 영매가 되기도 했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으니, 그의 나이 22세때, 자신의 침실에서 회심을 경험한 것이었다.
찰스 스펄전이 그랬던 것처럼, 회심과 함께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확신한 아더 핑크는 설교자가 되었고 영국의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서 무디 신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 후 평생을 성경 연구와 설교 사역에 헌신했다. 이후 미국 동부의 여러 주들과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 등지를 돌아 다니면서 설교와 성경연구를 병행하는 '순회 설교자'로 활동하면서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1922년에 자신의 사설 월간지 '성경 연구'를 창간하여 자신의 성경연구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켄터키 주 버크스빌과 알바니에 있는 교회들의 공동 목회자로 사역을 시작했으며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스파튼버그에 있던 노스 사이드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18년 첫 번째 책으로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을 썼다. 그리고 1922년1월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 첫 호를 발간했으며 30여년 동안 거의 자신의 글들로 지면을 채웠다. 그 글들은 대개 성경 강해와 주석이었다.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그의 연구 주제는 은혜, 칭의, 그리고 성화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사역은 강렬한 그의 설교 스타일 때문에 교회들의 외면을 받았다. '듣기 좋은 설교'가 주를 이뤘던 당시의 교회들에게 심한 배척을 받게 된다.
아더 핑크는 초기 15년 동안은 존 다비나 C.H. 메킨토시 등의 '세대주의자들'의 책들을 주로 탐독하였는데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찰스 스펄전 등 청교도들의 글들을 깊이 탐독하면서 청교도 정통신학 위에 확고히 섰고 나중에는 '세대주의 신학'은 오류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925년부터 3년간의 호주 시드니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영국에서 설교자로 일하기를 바랬으나 자리를 얻지 못하자 미국의 자신의 옛 회중에게로 가서 사역하려 했는데 이제 청교도적 신학 위에 확고히 서 있는 가운데 선포되는 그의 설교는 배척 당하게 된다.
1929년부터 사실상 그의 '강단설교사역'은 끝났는데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빈번한 그의 주거지 변경은 그가 성경연구와 아울러 설교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34년에 그는 영국으로 귀국하여 남부의 호우브에 정착하여 궁핍한 삶 가운데서도 '성경연구'와 '성경연구지' 발행에 몰두하였다.
1930년대 중반 경 그는 이미 청교도 서적을 1백만 페이지 이상 읽은 상태였고 '성경연구지'에 실렸던 글들을 포함해 여러 권의 단행본들이 촐판되었다. 월간 '성경연구'에서 그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성경연구지'는 신청하면 누구에게나 무료로 배포되었고 독자들은 대체로 1,000명 정도였다. 그의 독자들이 그에게 서신으로 '신앙상담'을 신청하면, 그는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는데 이런 이유로 그와 그의 독자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목자와 양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독자들과 주고 받은 서신이 2만통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것들 중 일부만이 '핑크 서간문'이라는 책으로 오늘날 남아 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아더 핑크는 안전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사역을 진행하기 위해서 영국 북서부의 '헤브리디즈 열도' 중 가장 큰 섬인 루이스 섬의 스톤웨이로 이주한다. 루이스 섬은 제주도 정도의 면적을 가진 큰 섬인데, 일찍 산업혁명을 맞아 도시화가 많이 이루어진 20세기의 영국의 상황에서는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황량한 곳으로 오늘날도 섬 전체의 인구는 2-3만명에 불과하다. 그런 오지였지만, 아더 핑크는 그곳에서 집세를 내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는데, 세상에서의 부와 명성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말씀연구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한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삶이었다.
루이스 섬에서 12년간,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묵묵히 감당한 아더 핑크는 1952년 7월15일, 존 칼빈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하고 임종하여 스톤 웨이 공동묘지에 묘비없이 묻혔다. 오늘날 핑크의 묘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묘비는 물론 아무것도 없는 맨 잔디밭 위에 카메라를 대고 사진을 찍어간다고 묘지 관리인은 말한다.
핑크는 자신의 글이라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했으며 또한, 자신의 영광을 전혀 추구하지 않은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의 성경연구지에 자신의 사진 한 장 싫지 않아서, 사진을 보내 달라는 독자에게 여권에 붙이기 위해 찍었던 사진을 보낼 정도였다. 1916년에는 베라와 혼인하여 단란한 가정도 이루었다.
비록 당대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핑크의 사역은 그의 사후에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1982년 미국 베이커 출판사는 그의 책22권을 출간했으며 놀라운 성공을 거둠으로써 그의 진가를 확인했다. 그는 1952년에 사망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아더 핑크의 구원 신앙」,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창세기 강해」, 「여호수아 강해」,「다윗의 생애」, 「하나님의 언약」, 「성화론」, 「좌절과 하나님의 위로」, 「거룩한 안식일」, 「믿음의 영웅들」, 등이 있다.